나의 광기 모음 1
사람들과 이야기를 하다보면 다소 특이했던 경험들, 그리고 내가 생각하기에도 기가 막힌 우연이었던 내 삶 속의 사건들을 모았다. 1. 초등학교 4학년이었던 2013년 6월 14일에 처음 큐브 맞추기에 도전했다. 그리고 제대로 몰두하기 시작한 것은 초등학교 6학년이 되었을 때부터였다. 중학교에 올라가서도 학교 친구들보다는 네이버 카페에서 만난 랜선 친구들과 큐브에 대한 소통을 더 많이 했고, 부모님을 고생시키며 전국 각지의 큐브 대회에 참가했다. 2번의 한국 신기록을 세워보고, 모르는 사람들에게 온라인 강의같은 것을 해보기도 했던 경험들이 앞으로 일어날 모든 일들의 시작이 될 줄은 나조차도 알지 못했다. 결국 나는 큐브를 하다가 만난 친구와 같은 고등학교에 진학했다. 2. 고등학교 1학년을 마친 후의 겨울방학이었다. 매일 독서실에서 고등학교 2학년 과정을 예습하며 다항함수의 미적분을 처음 접했는데, 공부를 하다가 쉬는 시간에는 유튜브에서 지수함수나 삼각함수의 도함수를 유도하는 영상을 보곤 했다. 훗날 나는 이를 대학교 전과 면접에서 말하게 된다. 3. 고등학교 2학년이 끝날 무렵, '미분과 적분'에 관하여 생활기록부 세특으로 쓸 내용을 생각하던 중 접한 것이 선형 회귀였다. 당시 알고 있던 이과 친구들이나 기숙사 룸메이트에게 물어보며 손실함수를 미분하여 경사하강을 하는 과정에 대해 알게 되었다. 이 무렵 나는 이게 나의 길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4. 고등학교 3학년 개학을 앞두고 파이썬을 처음 접했다. 친구에게 물어보니 위키독스에서 Do it! 점프 투 파이썬을 보라고 해줘서 그렇게 했고, 3학년 1학기에는 선형 회귀와 로지스틱 회귀를 파이썬 코드로 돌려보았다. 이를 바탕으로 3학년 1학기에는 세 과목의 세특을 엮어 학급 친구들에게 설문조사를 하는 프로젝트같은 것을 했다. 중간고사가 끝났을 쯤 선행 연구를 찾아보고, 질문지를 만들고, 다시 수집했다. 기말고사가 끝난 후에는 수집한 질문지를 직접 파일로 바꾸고, 친구의 도움을 받아가며 회귀 분석을 하는 코드를 돌려보고 발표까지 하니 한 학기가 끝났다. 당시에는 그냥 한글로 쓰여진 어떤 논문을 읽으면서 그냥 흥미로웠고, 되는대로 하다시피 진행했지만, 돌아보면 그 모든 것들이 제법 의미있는 경험이었다. 5. 수능이 끝난 후에도 나는 밤이 되면 친구와 심야자습실에 가곤 했다. 그리고 그곳에서는 실감이 만들어지고 있었다. 6. 성인이 되고 한양대학교 경영학부에 입학했다. 내 주변 친구들은 보통 공대로 입학한 후 미적분학을 수강하고 있었다. 나는 그 친구들에게 미적분학 강의자료를 보내달라고 했고, 경영관에 앉아 미적분학의 첫 내용인 엡실론 델타 논법과 삼각함수 역함수의 도함수 등을 살펴보았다. 덕분에 1학년 여름학기가 되자마자 수강한 미분적분학1에서 A+를 받는 데에 도움이 되었다. 7. 1학년 여름방학과 2학기는 아마 실감의 존속에 있어 가장 큰 위기였다. 발전 가능성에 대한 회의가 제기되었고 그냥 묻어두는 프로젝트가 될 수도 있었다. 이 시기에 내가 나서서 지속적인 관리와 위클리 미팅을 유지했던 것은, 지금까지 내가 실감에 한 가장 큰 기여라고 생각한다. 덕분에 3개월 후 실감의 DAU가 20배 이상 상승하고 많은 유저들의 감사 인사를 받았을 때, 이게 현실인가 싶으면서 생전 처음 느껴보는 기분 좋음을 느꼈다. 8. 대학교 입학 전부터 목표하고 있던 데이터사이언스학부 다중전공 신청이 1학년 말이었던 12월에 반려되었다. 종강 후에도 앞으로 어떻게 해야 할지 고민하다가, 그 시기에 공지가 올라오는 전과에 도전했다. 2학년이 되던 해였던 2023년의 1월은 대부분의 시간을 방에 틀어박혀서 지냈다. 전과 지원을 위해 포트폴리오로 쓸 거리를 만들고, 그러기 위해 공부도 더 하고, 파이썬 코드도 열심히 돌려보는 것에만 열중했다. (그 와중에도 실감 인앱결제 상품을 만들기 위해 이용약관과 개인정보처리방침을 쓰긴 했다...) 9. 전과 면접에서는 오히려 미분적분학1의 A+ 학점에 대한 얘기가 나와서 수학 공부에 대한 경험을 말했다. '고등학교에서 이과는 아니었지만 초월함수의 미분법 등에 관심을 가진 것이 도움이 되었다'는 등의 이야기를 했다. 전과에 성공하지 못하면 어떻게 해야할까 하는 걱정과, 나는 합격할 수 있을 것이라는 믿음이 혼재되어 미치도록 혼란스러웠던 2023년 1월은 당월 30일에 전과 신청 결재 통보를 받으며 막을 내렸다.
인사이드 아웃 2 후기
1. "Maybe this is what happens when you grow up. You feel less joy." 누구나 가끔 하는 '걱정없이 살던 어릴 적으로 돌아가고 싶다' 라는 생각을 보여주는 것만 같아서 영화가 끝나도록 이 장면이 계속 생각났다. 나이가 들수록 느낄 수 있는 기쁨과 고통의 크기가 더 양극화되는 것이라 생각하긴 하지만, 그래도 옛날의 즐거움을 다시 느낄 수 없음은 별 수 없이 우리를 슬프게 한다. 2. 어릴 적의 Sense of Self를 더이상 지키지 않는 기쁨이 컨트롤 센터에서 좌천(?)됐다가 돌아온 후, anxiety 이외의 감정들이 배제되고 있던 모습을 보고는 기쁨이 역시 과거의 Sense of Self를 떼어버리는 모습은 모두의 성숙을 의미하는 상징적인 장면이었다. Sense of Self의 형성에는 결국 모든 감정들이 필요함을 모두가 인정하게 되는 장면이, 다소 뻔한 전개일 수 있지만 충분히 인상적이었다. 3. 우연히도 시기상 내가 사춘기를 보내기 전에 인사이드 아웃이 처음 개봉했고, 9년이 지나 내가 사춘기를 보낸 후에는 인사이드 아웃 2가 세상에 나왔다. 여러 감정들이 서로의 존재성을 인정하게 되는 성장의 과정이, 지난 9년간 내가 겪어온 모든 일들을 함축하는 듯 했다. 동시대에 내가 성장하며 마주한, 청소년이 '어른이 되어가며' 겪는 어려움들에 대해 유머를 섞어 보여주는 것이 되려 미치도록 아프다.
데이터사이언스학부에서 경험한 것들 (1)
데이터사이언스학부로 전과를 한 후로 예상치 못한 좋은 경험들이 몇 가지 있었는데, 그 중 하나는 이곳의 수업에 외국인 유학생/교환학생들이 많다는 점이다. 은근히 다양한 국가에서 온 학생들을 만날 수 있다. 내가 본 것만 말레이시아, 프랑스, 독일, 룩셈부르크, 모로코, 터키에서 온 학생들이 있었다. 많은 외국인 학생들과 가장 기억에 남는 것 중 하나는 전과 직후에 수강한 미국인 교수의 수업(머신러닝1)이었는데, 해당 수업에서 약 40%가 외국인 학생이었고, 그중 몇몇과 이야기해보면 확연히 어딘가 다르다고 느껴진 지점들이 있었다. 1. 전과 직후에 수강한 미국인 교수의 수업에서 가장 만저 친해진 친구는 룩셈부르크에서 온 교환학생이었다. 무슬림이고 라마단을 하는 친구였는데, 가끔 수업 후에 점심 학식을 먹으며 여러 이야기를 하곤 했다. 한 번은 룩셈부르크와 한국의 집값을 비교한 것도 기억에 남지만, 가장 기억에 남는 것은 자신이 룩셈부르크에서 대학교를 다닐 때 '일단 같은 수업을 듣는 학생들 모두와 인사를 한다. 어차피 잘 안맞는 학생이면 그 이후로 더 친해지지 않으면 되니까.' 라고 말했던 것이다. 한국 학생들끼리는 제법 경직되어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2. 이와 관련해서 한 가지 원인이 되지 않을까 싶었던 것이 언어였다. 사용하는 언어는 사고방식을 바꾼다. 그렇게 생각하게 된 것은 그 미국인 교수의 수업에서 친해진 말레이시아 친구와 우연히 함께 팀프로젝트를 한 것이 계기가 되었다. 나중에 돌아보니 우리는 한 번도 서로의 나이를 직접 물어본 적이 없었다. (여럿이 모인 상황에서 입학 연도나 나이 얘기가 나온 적은 있었지만) 어차피 항상 영어로 대화하니까 나이를 물어가며 어떤 단어 선택을 해야 할지 신경써야 하는 것도 아니고, (나에게는) 나이를 궁금해할 유인이 없었기에 우리가 서로의 나이를 모른다는 사실조차 의식하지 못하고 있었다. 한국인들끼리도 친해지면 나이를 불문하고 허물없이 지내지만, 그것만으로는 따라잡기 힘든 벽이 한국어에는 있다고 느낀다. 3. 그 미국인 교수의 수업에서 만난 독일 출신 교환학생도 있었다. 항상 맨 앞자리에 앉아서 거의 매 수업마다 질문을 하고, 매 수업마다 있는 3-4인 discussion에서도 항상 충분히 발언을 하는 타입이었다. 그 친구가 했던 말 중 가장 기억에 남는 것은, '데이터사이언스와 직결되는 전공을 하는 게 아닌데 왜 이 수업을 들으러 왔냐'는 다른 한국인 학생의 질문에 'Because I'm interedsted in it' 이라고 답하던 모습이다. 학생이 되기를 선택했다면 자신이 열의가 있는 분야를 공부하기 위해 노력하는 것이 마땅한 일일텐데, 왜 그것이 이곳에서는 그토록 보기 힘든 모습이었나 아직도 생각해보게 된다. 번외: 비록 그 수업이 빡센 탓에 에타 평점은 1.6이지만(...) 그 수업 자체도 재밌었다. 매 수업마다 3-4명씩 조를 만들어주면 그 수업의 특정 주제에 대해 이야기하고 각자의 결론을 반 전체와 공유하곤 했다. 한 번은 gradient descent를 설명하는 수업에서는 '산 위에서 도구 없이 아래로 내려오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가 논의 주제였는데, 나는 도저히 생각이 안나던 와중에 어떤 학생들은 '땅을 판다', '몸을 말아서 굴러내려온다', '일단 이동하면서 물을 끓이면 끓는 점이 변화하는 것을 관찰한다' 같은 답을 하는 걸 보고 배울 점이 많다는 생각을 했다. 번외2: 이번 글은 빠니보틀의 영상(https://youtu.be/JeKinbHJnok?si=yKxRlRrdCtOaZVjE&t=2489)에서 아떤 외국인이 영어로 말하는 걸 못알아들었지만 알아들은 척 하는 부분을 보고 생각이 나서 썼다. 왜냐하면 나도 처음 전과했을 때부터 지금까지 그런 적이 많았던 기억이 나서...
중간 점검
올해는 6년만에 본가인 충주에서 생일을 맞이했다. 매일 새로운 논문과 연구가 쏟아져 나오며 쉴 새 없이 발전하고 있는 나의 전공에서 벗어나, 풀과 나무가 우거지고 점심 시간이면 캐논 변주곡이 흘러나오는 아파트 단지를 걸으며 이곳의 여유를 느끼면 마치 다른 차원에 와있는 듯한 느낌이 든다. 성인이 되기 전 2년, 그리고 성인이 된 후 2년 반이 지난 지금까지는 매 순간이 격변의 시간들이었다. 성인이 되기 전에는 나의 길이 이공계열임을 확실히 하며 공부에 눈을 떴고, 성인이 된 후 첫 1년을 보내며 그중에서도 데이터사이언스를 나의 전공으로 쟁취했고, 다음 1년은 학교에서 대부분의 시간을 보내며 39학점의 전공 과목을 이수했다. 그리고 최근 반 년간은 이전에 비해 친구들을 더 많이 만나고, 공부 이외의 소중한 것들에 대해 돌아보고자 노력했다. 나에게 있어 시기를 막론하고 time-invariant한 특징이 한 가지 있다면 기록하고 정리하는 일을 좋아한다는 점이다. 노션 등의 툴들을 훨씬 체계적으로 쓰는 친구들은 있지만, 나처럼 가는 곳마다 사진을 찍어두고 시기별로 생각들을 정리하는 것이 습관화된 경우는 드물었다. 돌아보면 이런 나의 성향을 고려해봤을 때, 내가 데이터를 다루는 전공을 선택한 것은 기막힌 필연이었다고 생각한다. 대략 2015년부터 본격적으로 쌓여온 사진과 글들, 그리고 그 때부터 들어온 노래들은 먼 옛날의 나와, 지금 여기의 나와 나아가 먼 훗날의 나를 이어주고 있다.* 스퀘어 한국 신기록을 세운 부산 대회 주변에서 찍었던 사진을 보면 당시 밥먹고 큐브만 돌리던 그날의 치기가 떠오르고, 수능 당일 아침에 고사장으로 가는 길에서 찍었던 사진을 보면 입시와 진로에 대한 고민에 휩싸인 채로 맞았던 서늘한 바람이 느껴지는 듯 하다. Sithu Aye의 Double Helix를 들으면 아직도 수분감을 풀면서 졸다가 깨어나던 내가 보이고, 여자친구의 열대야를 들으면 처음 대학교에 입학하고 많은 것들이 낯설던 생경함이 생각난다. 그리고 이러한 이야기들을 그에 맞는 사진이나 노래와 함께 이야기하는 것이 여가로써 내가 가장 좋아하는 일들 중 하아니다. 이런 나에 대한 기록들은 나의 외장SSD, 티스토리 블로그, 깃허브 블로그에 저장되고 있었다. 그리고 이제는, 모든 것들을 통합해 나에 대한 '온라인 전시 공간'을 만들고 싶어졌다. 내가 찍는 사진들, 남기는 글들, 공부한 기록들, 좋아하는 음악들에 대한 기록들이 이 사이트를 통해 한 번에 정리될 것이다. 내가 찍는 사진들, 좋아하는 음악들, 그리고 내가 하는 생각들을 기록하는 공간. 그런 공간을 만들어낸다는 것은 잠시 쉬어가는 활동이자, 지금까지의 삶을 돌아보는 시간이기도 하다. 최근에는 정말 말도 안되는 우연으로 만난 사람들을 통해 결정적인 도움을 받곤 했는데, 돌아보면 한 편으로는 반대로 과거에 큰 도움을 받았지만 이제 연락조차 하지 않는 경우도 많다. 잊고있는 고마움도 많다는 것을 외면하고 살았고, 이제 그에 대해 돌아보는 시간이다. 곳간에서 인심이 나온다고, 전공과 진로에 대해 폭풍같던 시간들이 지나고 어느정도 생각들이 수렴해가기 시작하니 이런 여유도 부릴 수 있게 됐다. 앞으로의 삶에 있어서도 diffusion term이야 어찌 할 수 없지만, drift term은 확실히 방향을 잡았다고 느낀다. 이제는 금요일 저녁마다 친구를 만나러 가고, 가끔 배드민턴을 치고, 친구 집에서 Wonderwall을 들으며 콘솔 게임을 해보는 여유를 부릴 수 있게 되었다. 현재도 즐거운 일들이 많이 있고, 앞으로는 더욱 행복할 것이라는 기대가 있다. 그런 먼 훗날의 내가 이 글을 다시 읽고 있을 날을 생각하니 그것조차 기분 좋은 일이다. 그때까지 앞으로 어떤 마음가짐으로 살아갈지에 대한 생각은 제법 명학하다. 그것은 코난의 말과도 같다. "Work hard, be kind, and amazing things will happen". * 허준이 교수의 2022학년도 서울대학교 후기 학위수여식 축사에서 인용